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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필 칼럼 – 메르스와 성경 속의 테러

 

2015-06-18 LA 중앙일보

메르스와 성경 속의 테러

박용필

박용필 / 중앙일보 논설고문

 

불치의 골수암에 걸린 여인을 만나 58세에 첫 결혼을 한 이 남자. 하지만 4년 후 그 여인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다.

지난 1993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영화’로 꼽은 ‘섀도우랜드(Shadowland)’는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다.

남자는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가슴을 지녔다는 C. S. 루이스(1898~1963).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 의심할 여지 없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로 꼽힌다. 그런가 하면 판타지 문학의 대가(나니아 연대기)로도 이름을 날렸다. 타임이 그렇게 소개했다. 부고 기사에서.

그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는 조이 그레샴. 컬럼비아 대학 출신으로 그 역시 날카로운 지성과 한계를 모를 상상력을 지녔던 작가다. 뒤늦게 만나 사랑을 불태웠으나 짧은 삶을 살다가 이승을 떠났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 고통이 키워드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아내를 병수발 했으니 좌절이 얼마나 심했으랴. 그런데도 루이스에게 고통은 축복이다. 아내가 죽은 후 ‘슬픔의 관찰’을 쓰는 등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다룬 저서를 많이 남겼다.

믿기지 않겠지만 루이스는 기회 있을 때마다 테러를 찬미해 ‘이 시대의 진정한 테러리스트’란 별명도 얻었다. 그에게 고통과 테러는 동의어로 삶을 풍성하게 하고 신을 알게 하는 힘이었던 것.

테러의 사전적 의미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폭력이다. 그런데 루이스가 왜 뜬금없이 테러를? 바이블에는 테러가 수십군데 나온다. 창세기는 물론 신약에 이르기까지. “야훼의 두려움이 주변 도시들을 휘어잡아서 아무도 야곱의 자손들을 추격하지 못했다.”(창세기).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휘몰아치는구나.”(욥기).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언급된다.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성경에선 ‘테러=악’이란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영어 텍스트엔 ‘주님의 테러(terror of the Lord)’로 표기돼 있다. 이슬람 과격파들은 이 같은 성경구절을 빌미로 기독교의 신은 테러리스트라고 선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테러를 명확하게 정의 내린 이가 바로 루이스다. 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공경심이 곧 테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 마냥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 세상이 하루라도 편안한 날이 없다. 오사마 빈 라덴이 가고 나자 알카에다 보다 더 세고 끔찍한 테러집단 이슬람 국가(IS)가 나와 지구촌이 온통 뒤숭숭하다.

테러가 어찌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일어나겠는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광적인 집착도 따지고 보면 테러인 것을. ‘천재소녀’의 명문대 입학 해프닝도 일류병이 낳은 결과물일진대. 딸의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또한 테러 아니면 무엇일까.

그 뿐이 아니다. 한반도를 덮은 바이러스 테러로 온 나라가 마치 ‘메르스 병동’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사스나 신종플루를 뛰어넘는 대재앙이 올 거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메르스에 대한 두려움이 세월호 슬픔을 압도했다는 여론조사도 나와 테러 후유증이 오래 갈 것 같다.

삶의 지혜를 담았다는 잠언에도 테러가 몇차례 등장한다. “야훼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어쩌면 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작금의 세태가 지구촌 곳곳에 공포를 키우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한낱 피조물 주제에 감히 신의 영역인 테러를 흉내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