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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정직으로 오른 항공계 최고 영예-체스터 장 박사

신념과 정직으로 오른 항공계 최고 영예-체스터 장 박사

 

2015-06-11 한국일보

신념과 정직으로 오른 항공계 최고 영예

[한국일보 초대석] 체스터 장 박사 – 미국방대학 재단이사

장-1
◈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명예의 전당 헌액
– 영예와 자긍심의 심벌

◈ 8세 때 부친따라 미국에
– 처음 타 본 쌍발기에 매료
– 고교졸업 전 조종사 자격

◈ FAA 검열관 활동 헌신
– 걸프전 자문관 등 참여
– 국방대학 재단이사 선임

◈ 한국미술품 수집에 열정
– 스미스소니언·LACMA 기증
– 인생후반 예술과 봉사의 길

‘신념이란 무엇인가. 신념(Commitment)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신념은 정직(honesty)에 바탕을 둘 때 완성된다. 그리고 멘토십(montorship)과 같이 할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신념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단호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도대체 신념이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다고도 했다. 오랜 미 주류사회에서의 생활로 한국말이 서툰 그는 신념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glass ceiling(유리천장)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인 후배들을 향해 신념을 가지고 도전하라는 외침이었다.

그가 바로 지난 4월1일 미 항공계의 최고영예인 ‘라이트 형제 마스터 파일럿 명예의 전당’(Wright Brother Master Pilot Hall of Fame) 항공 안전부문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은 체스터 장(76) 박사다.

이 명예의 전당 헌액은 50년 이상 미 시민권자이면서 항공분야에서 50년 이상 근무해야 하고 일생동안 한 번의 사고나 어떤 위반사항이 없어야 하며 국가적으로 항공분야에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미 항공계에서는 영예와 자긍심의 심벌로 통한다.

지금까지 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사람은 닐 암스트롱(항공우주부문·인류최초 달 착륙자), 진 서난(항공우주부문·마지막 달 착륙자), 척 예거(초음속돌파 비행부문·최초 초음속돌파 조종사), 클레이 레이시(상업항공부문·프라이빗 제트기 창설자), 러스 마이어스(상업항공부문·영화감독·항공전문가), 밥 후버(항공영웅부문·미 공군 전설적인 조종사·‘파일럿 중의 파일럿’으로 통함), 아놀드 파머(스피드비행부문·전설적인 골퍼·비행전문가) 등으로 수상자의 이름만 들어도 어떤 영예인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 – – –

체스터 장 박사에게 항공기는 그의 신념이자 인생이다. 그는 “항공이야말로 나의 삶의 전부였다”고 말한다. 그가 항공기와 인연을 맺은 것은 8tp이던 1947년, LA에 첫 영사관 설치업무차 미국에 온 부친 장지환씨를 따라 비행기를 타면서 시작됐다.

그는 당시 운항하던 노스웨스트 항공을 타고 도쿄와 일류션 열도, 알fo스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 도착하는 장장 45시간의 긴 비행동안 비행기 조종실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이것이 이후 57년을 항공기와 삶을 같이하는 계기가 됐다.

비행기에 반한 그는 1958년 LA 하이를 졸업하던 18세에 민간 비행기조종사 자격증을 땄다. USC에 진학해 ROTC(학군장교)를 하면서 수차례 조종 경험도 했다. 장 박사는 졸업하자마자 비행기와 첫 인연을 맺었던 노스웨스트 항공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다.

“그때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키가 작아 신체조건에서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처음으로 glass ceiling을 맛봤습니다. 그래서 스트워드 데베스 항공사에 입사해 근무하고 있었던 대한항공 설립자 고 조중훈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항공사를 설립하니 조종사 교육을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의 일이었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2년동안 대한항공 조종사 교관으로 일했는데 당시 훈련 조종사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반짝이는 눈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1972년 4월19일 오후 5시19분. 체스터 장 교관과 승객과 승무원 100여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출발한 KE002 보잉 707 여객기가 도쿄와 호놀룰루를 경유해 만 하루만에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니까 소니아 석 여사 등 수천명의 교민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반가운 나머지 공항이 온통 눈물바다더군요. 이때 ‘칼- 타고 왔쑤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장 박사는 그는 이때 처음으로 가슴 뭉클한 애국심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변변치 않은 항공기를 몰고 태평양을 건널 때의 조종사들의 상기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는 항법장치가 모두 수동으로 이루어졌고 연료소모 측정도 어려웠기 때문에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순간이었다. 특히 이륙 후 연료소모량이 많을 경우 목적지까지 갈 수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기류와 거리 등을 측정하며 연료소모에 신경을 써야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1972년. 대한항공 조종사 교관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장 박사는 미 항공 전체를 관활하는 미항공국(FAA)의 문을 두드렸다. 항공안전을 검열하는 항공 안전검열관(aviation safety inspector)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시안 최초의 FAA 소속 안전검열관이었다.

그러나 말이 안전검열관이지 3년 동안 갖가지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대로 아웃되는 과정이었다. 그는 이때의 3년간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정열의 시간이라고 전했다.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다.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장 박사는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FAA 비행학교(Aviation Academy)에서 고등 항공훈련을 받았다.

FAA 비행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장 박사는 국방부로 발령받았고 한국 미8군에 배치돼 항공자문관(aviation senior a dvisor)으로 근무했으며 다시 주일 미대사관으로 전근돼 마이크 맨스필드 주일대사 시절 동북아와 동남아 전역을 커버하는 항공자문관으로 일했다.

이후 1987년부터 1992년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FAA 총괄책임자로 근무한 장 박사는 1992년 걸프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의 데저트 스톰(Desert Storm) 작전 당시 홍해(Red Sea)에 파견된 항공모함 SS 케네디호 항공전투 자문관으로 현장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쪼갤 수 없이 바쁜 시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USC에서 교육학 석사, 라번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공군전투대학(Air War College) 교육학 석사, 국립방위대학(National Defense University)에서도 국가안보 석사학위를 받았다. 장 박사는 이같은 공부에 대한 열정과 탐구정신이야말로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이같은 열정과 헌신으로 2012년 장 박사는 세계 최고의 군사 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 미 국방대학의 재단 이사로 선임된다. 미 국방대학은 세계 군장교를 대상으로 한 고등 군사교육 및 훈련기관이자 미 국가안보전략을 수립하는 미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다. 미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애국자상 수상자도 여기서 결정한다.

이같은 장 박사에게도 고난과 시련의 순간도 있었다.

“10세 때 LA타임스를 배달했습니다. 또래보다 키가 작았는데 선데이 판(일요일자 신문)은 무거워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는 신문 꾸러미를 둘러메고 LA 골목을 누볐던 일은 힘들긴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했다. 또 사랑하던 큰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후 미항공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릴 적 읽었던 J. A. Carney(1845)의 시 ‘Little Drops of Water’를 삶의 교훈으로 삼아 왔다고 말했다.

“Little drops of water
Little grains of sand
Make the mighty ocean
And the beauteous land

Little deeds of kindness
Little words of love
Make our earth an Eden
Like the heaven above…<중략>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거대한 대양을 이루고
작은 모래알들이 모여
아름다운 대지를 만드네

작은 친절이 쌓이고
작은 사랑의 말들이 모여
우리 세상이 하늘의 천국처럼
에덴동산이 되지…<중략>”

항공과 교육으로 인생의 전반부를 헌신했던 장 박사는 예술(art)과 봉사(service)에 생의 후반부를 바치고 있다.

명성황후의 동생인 민영휘씨의 외증손자인 장 박사는 자신이 소지한 수백점의 보물급 도자기, 그림 등 고문화재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LA카운티 박물관(LACMA),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USC 한국학연구소,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등에 기증했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그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엄청난 액수이다.

지난 2011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장 박사가 소장한 도자기에 관한 책 ‘정체성의 상징, 체스터와 완다 장 한국도자기 컬렉션’(Symbols of Identity, Korean Ceramics from the Collection of Chester and Wanda Chang)을 펴낸데 이어 2014년에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시기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품들, 체스터와 완다 장 컬렉션’을 잇달아 발행, 영구 보관과 함께 1950년부터 1953년 전란시기의 한국 예술품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이같은 예술품 사랑은 어린시절 미국에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1953-1957년 부산 피난시절에 경기고등학교를 2학년 다녔는데 그때 미술을 가르쳤던 박상옥 선생의 영향이 컸다. 장 박사는 그의 영향으로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한국 예술품을 수집했다.

오클라호마 근무 당시에는 PX에서 한국 미술품을 사기도 했고 주일 미대사관 근무 때에는 일본 골목을 뒤집어 한국 도자기와 그림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만다 미국 곳곳을 다니면서 한국 예술품과 미술품을 사 모았다. 그 때에는 “일본 골동품점에 가면 얼핏보아도 한국 도자기로 보이는 예술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나중에 올 테니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라고 약속하고 돌아와서 나중에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또 일부 미국인은 한국인 인줄 알고 한국에서 수집한 예술품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미국에 한국 예술을 심는 것은 우리 한국인의 몫”이라며 앞으로 계속해서 한국 예술품에 대한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현재 동북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을 커버하는 FAA 남서태평양 항공자문관으로 일하고 있는 체스터 장 박사는 부인 장원옥 여사와 샌타모니카에서 살고 있다. 아들 캐머런 장(33)은 의사로 일하고 있다. 장 박사는 2008년 11월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한 지지자의 ‘We have overcome’이란 플래카드를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Glass ceiling의 장벽은 어느 사회든 존재한다. 다만 신념과 정직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성공한 한 선배의 외침이 후배들의 가슴에 와 닿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하다.

<글 권기준·사진 박상혁 기자>